[Mozart]
세 살 때부터 하프시코드를 가지고 놀았다. 네 살엔 미뉴에트를 연주했고, 다섯 살이 되자 작곡을 했다. 모차르트의 귀는 8분의 1음 오차를 감지할 정도로 정확했고, 약음기를 부착한 트럼펫 소리에도 까무러칠 만큼 예민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여섯 살 아이를 데리고 연주 여행을 떠났다. 음악회는 재주 자랑에 가까웠다. 소년 모차르트는 자신이 작곡한 교향곡을 연주하고, 처음 본 소나타를 바로 치고, 변주곡으로 바꾸어 연주했다. 즉석에서 주어진 가사에 아리아를 작곡해서 직접 반주하고 노래도 불렀다. 그의 연주에 감복한 로마 교황은 황금박차 훈장을 수여했다.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의 결혼식에 사용할 음악을 작곡해 달라고 했다.
황실의 평가는 변덕이 심했다. 모차르트를 상찬하던 여제는 “거지나 다름없이 여러 나라를 떠도는 저들이 황태자를 시중든다면 황실의 격이 떨어질 것”이라며 아들에게 경고했다. 당시만 해도 음악가는 귀족의 후원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미천한 신분이었다. 성장기의 모차르트는 연회에서 악사용 출입문으로 드나들기를 거부하는 등 자신에 대한 모욕에 소소하게 저항했다. 그러다 마침내 황실의 후원을 거부하고 직접 대중 연주회를 열기로 했다.
모차르트는 술과 음식을 먹고 고성이 오가는 도박장, 레스토랑, 여인숙에서 신곡을 발표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청중이 조용히 앉아 음악을 감상한다는 건 생소한 일이었다. 그는 이제 막 유럽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피아노라는 악기에 주목하고, 비교적 낯선 음악 형식인 피아노 협주곡을 선보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이렇게 썼다. “이 협주곡들은 아주 쉬운 것들과 아주 어려운 것들을 이어주는 즐거운 징검다리입니다. 지루함 없이 귀에 아주 선명하고 기분 좋게 들어와요. 전문가들이 좋아할 만한 악구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지만 악구들을 분석할 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 들어도 왠지 모르게 그냥 아름답게 들리도록, 그렇게 썼어요.”
1785년 2월 11일 모차르트는 육중한 이중 건반이 달린 최신식 피아노를 끌고 조약돌이 깔린 오스트리아 빈의 뒷골목을 지나 사교장 멜그루베에 이르렀다. 150여 명의 음악 애호가가 그의 음악을 듣기 위해 모였다. 모차르트는 오케스트라 앞에서 <피아노 협주곡 제20번 D단조>의 시작음을 울렸다. 손 건반 외에 발로 치는 건반도 있었다. 피아노 협주곡 제20번의 초연은 두 손이 아닌 사지로 연주한 것이다. 청중은 환호했다. 모차르트는 1년에 여섯 차례 연주회를 열었고, 1787년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초연이 대성공하면서 절정기를 맞이한다.
<피가로의 결혼> 리허설 때 모차르트는 빨간 여성용 외투를 입고 금색 레이스가 달린 삼각모를 썼다. 모차르트는 왜소한 체격에 얼굴이 작고 코가 컸으며 안색은 창백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평범한 외양이었다. 그래서 화려한 의상이나 희한한 악기를 동원해 청중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
전통의 대들보인가, 음악적 반항아인가. 인간 모차르트를 두고는 여러 해석이 난무하지만 그의 음악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현대의 기준으로도 비범하고 뛰어나게 아름다운, 나아가 흠 없이 완전한 것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20세기의 지휘자 요제프 크립스는 이렇게 말했다. “베토벤은 힘겹게 분투하는 동안 이따금 천국에 가닿았다. 모차르트야 당연히 천국에서 왔고!”
[Beethoven]
베를린 필하모닉의 초대 지휘자였던 한스 폰 뵐로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피아노 음악의 ‘구약 성서’, 베토벤의 32개 피아노 소나타를 ‘신약 성서’에 비유했다. 바흐의 음악이 천상의 선율이라면 베토벤의 음악은 인간의 몸부림에 가깝다.
오스트리아 빈에 여드름투성이 청년이 나타나기 전까지 게리넥은 가장 인기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무명의 피아니스트와 경연한 뒤 게리넥은 풀 죽은 얼굴로 말했다. “그 젊은 친구는 악마와 한패인 게 틀림없어요. 그만큼 즉흥 연주에 능한 사람은 못 봤습니다. 자신의 작품이라고 연주한 곡들은 꿈도 못 꿀 정도로 건반의 난점과 효과를 잘 다뤘어요. 키가 작달막하고 못생긴 거무스레한 작자인데, 의지가 굳은 성격의 소유자 같았어요. 리히노브스키 왕자가 독일에서 빈으로 데려와 하이든, 알브레히츠베르거, 살리에리와 작곡 공부를 하게 했는데 이름은 베토벤이라 합디다.”
1792년 빈에 나타난 피아니스트 베토벤의 연주가 청중을 압도한 이유는 대양의 파도와 같은 그의 피아노 소리가 다른 모든 연주를 개울물 소리처럼 들리게 했기 때문이다. 빈 사람들은 뭔가 새롭고 근본적인, 거역할 수 없는 힘과 마주쳤음을 느꼈다.
베토벤은 컨디션이 좋을 때도 정확히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아니었다. 때론 비참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러나 변덕스럽게 칠지언정 박자는 반드시 지켰고, 악보에 없는 음이나 장식음을 첨가해 연주하지 않았다. 다만 많은 음을 강조해서 쳤다. 빈의 비평가들은 베토벤의 ‘격렬한 감정 표현’에 대해 논평하기 바빴다.
베토벤은 빈에서 가장 많은 피아노를 망가뜨린 피아니스트였다. 연주에 도취해 피아노를 때려 부수듯 두들기면 줄이 끊어지고 해머가 망가졌다. 첫 화음을 치면서 줄을 6개나 끊어뜨린 적도 있었다. 그의 제자 체르니는 “그 시대의 약하고 불완전한 피아노포르테는 그의 거인적인 연주 스타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면서 “베토벤의 손은 털로 수북하게 뒤덮였고, 손가락 끝부분은 대단히 뭉툭하며, 10도를 다 짚을 수 없는 크기였다. 그 손으로 많은 사람의 눈물을 자아냈지만 일부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그의 화음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고 전한다.
1818년 존 브로드우드는 베토벤에게 음역이 여섯 옥타브가 넘는 훌륭한 그랜드 피아노를 보냈다. 그 시대 피아노와는 전혀 다른, 음향이 커다란 피아노였다. 베토벤은 크게 기뻐하며 여생 동안 그 악기만을 썼다. 그 무렵 베토벤은 청각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귀머거리가 된 채 혼돈에 잠긴 베토벤은 험상궂은 얼굴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자신은 들을 수도 없는 음들을 두들기곤 했다. 베토벤의 말년에 그의 집을 방문한 한 악기 제조업자는 그의 피아노를 보고 놀랐다. “피아노의 높은 음역 소리는 전부 약음기를 쓴 것처럼 소리가 났고, 끊어진 줄들은 서로 엉켜서 마치 폭풍우가 가시덩굴을 휘저어 놓은 것 같았다.” 귀머거리 피아니스트는 벙어리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20대에 찾아온 청각 장애는 베토벤을 평생 괴롭혔다. 10년을 시달린 뒤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아직 선행을 베풀 수 있는 한 인간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진작 내 삶을 끝냈을 것이다. 당연히 내 손으로.” 그가 베풀기로 맹세한 선행은 위대한 음악을 세상에 선사하는 것이었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monograph #3》 손열음 편을 참조해 주세요. 리스트, 쇼팽, 라흐마니노프, 드뷔시 등 전설의 피아니스트에 대한 에피소드를 담았습니다.